목차
- 아이의 000을 열어주는 괴테의 문학
- 이성과 감정 사이의 갈등 이겨내는 법
- 괴테의 문학으로 배우는 삶의 지혜
- 우리 아이의 잠재된 00을 깨워주세요.
Editor 정탄 선생님과 제자 Career (현) 제이티스쿨 대표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읽고, 아이의 감수성 열어주기
“모든 것을 갈망하고 원하는 시기에 나와 신의 첨예한 대립을 구경으로 삼아 오는 사람들은 많았다. 신은 나에게 제한된 규칙성과 통제, 멈출 수 없는 희망을 주었으며, 나 또한 신에게 인간의 근성을 보여주었으며, 사람의 시선들을, 따가움을 선물로 주었다.
그럼에도 난 신을 이길 수 없었고, 사람들은 한 인간의 잔혹한 승리를 원했으나 지나친 손해를 보고 간 듯한 표정을 지으며 아쉬움의 잔상을 하늘에 아로새기듯 발걸음을 집으로 재촉하였다.
신이라는 것이 정말로 대단한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잘못된 오산이란 것을 알려주고 싶었지만… 결국 실패하는 것이 인간의 어중간한 성격을 만든다는 생각에 굴욕을 곱씹듯 느껴보았다.”
– 요한 볼프강 폰 괴테,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中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은 베르테르가 자신이 사랑하는 여자에 관한 이야기를 빌헬름에게 알려주는 형식으로 전개됩니다.
여기서 베르테르는 자신이 가질 수 없었던 여자, “샤를로테 부프”를 통해 자신이 얼마나 나약하고 미약한 영향을 촉망받는 세상에 미치게 되는지를 알게 되죠.
베르테르의 이야기는 마치 바흐와 헨델의 역사와도 같았습니다.
그들은 태어난 시기와 나라, 성공한 시기와 죽음의 방법까지 거의 일치했는데요.
바람처럼 지나간 그들의 인생에서 죽음의 방법은 참으로 끔찍했습니다.
아무리 진정으로 성공한 음악가라도 그 음악으로 자신의 “노안”만큼은 치료할 수 없었죠.
영원한 불멸을 누리고 싶어 했던 진시황처럼, 서양의 음악가들도 눈을 고치고 싶었을 겁니다.
그러나 그들은 사기를 치던 의사 “존 테일러”라는 의사에 의하여 카우칭이라는 수술을 받고 영원히 실명을 하게 됩니다.
바흐와 헨델은 테일러의 배신을 견디지 못했고, 결국 그들은 몇 개월 안에 사망하고 말았습니다.
바흐와 헨델의 사례를 보아 알 수 있듯, 사람은 누구나 욕망에 가득 차 있습니다.
마치 조용한 학교 안에서 울리는 바이올린 소리의 메아리를 듣는 것처럼, 우리는 하나의 행동조차도 남김없이 태워 자신을 충족시켜야만 만족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
본능과 충동이라는 요소는 우리에게 심미적 갈등을 주는 요소입니다.
신은 ‘나’에게 “갈망”이라는 본능을 주었고, ” 욕망과 사랑”이라는 충동을 주었죠.
이성과 감정 사이의 갈등 이겨내는 법
욕망의 예시를 들어볼까요?
<헤세가 들려주는 나비 이야기>에서 우리는 그 욕망의 실현을 자세히 볼 수 있습니다.
하인리히의 광적인 나비 수집은 에밀과의 갈등을 불러옵니다.
하인리히는 결국 양심을 지키지 못한 자신이 부끄러워 자신이 수집한 나비를 모두 부스러뜨려 없애버리고 마는 비극적인 결말을 보여줍니다.
그는 무엇을 원했기에 대립을 원하는 ‘나’에게 이러한 감정을 다스리라 했던 것일까요?
신은 우리에게 희망 고문이라는 요소와 그를 향한 정확한 규제의 성질을 주었습니다.
이것은 마치 신이 교활하며, 단순히 재미를 충족하기 위한 목적으로 인간의 욕망을 이용하는 존재인 것처럼 보이게 만듭니다.
그 때문에 신과의 대립은 쉽지 않은 요소가 될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신의 가호를 전적으로 받아들이고 행복해하던 베르테르도 결국은 신의 의도에 좌절감을 느껴 죽은 것처럼 말이에요.
감정적인 본능의 충돌과 이성적 규제의 충돌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인간의 본성을 따지고 있는 걸 수도 있겠습니다.
그 충돌에 굳이 이유를 따지자면 앞서 말했듯 인간 욕망의 파괴를 보고 싶어 하는 교활한 신의 술수라고 생각하면 좋을 것 같네요.
괴테의 삶과 문학, 아이에게 전해주는 삶의 지혜
1) 베르테르의 사랑
베르테르는 진정한 사랑을 했습니다.
신의 교활한 술수에 관해서는 잠시 배제하고 보자면, 세계적인 대문호 괴테는 평생 여러 여성을 사랑했습니다.
그는 특히 이뤄질 수 없는 사랑이나 불륜 등 다채로운 여성 편력으로도 유명한 인물입니다.
이 책,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처음 읽을 때는 그런 생각이 들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의 과거를 알아버린 뒤에는 달랐습니다.
제 눈에는 그가 하는 행동들이 마치 잘 돌아가는 톱니바퀴에 나뭇잎이 끼인 듯 삐걱대는 것만 같았습니다.
괴테에게는 “원래 그랬던 사람”이라는 수식어가 추가되었습니다.
괴테라는 글자에 하나의 먹물로 이뤄진 획이 그어지고, 자신을 드높이던 명예가 한순간에 추락하는 것을 괴테는 느꼈을까요?
자신의 “로테”를 향한 이뤄질 수 없는 사랑만큼이나 이루기 힘든 “권력 유지”의 비결은 자신의 괴짜 같은 글 실력이었을까요, 아니면 사람들의 “쟤는 원래 괴짜 같아서”라는 약간은 안도의 뜻을 표하는 수식어 덕분이었을까요?
어쩌면 그는 더 이상 상처를 받고 싶지도, 모진 말로 로테를 울리고 싶지 않았기에, 자신의 망상 속 로테의 모습을 사랑했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 이대로”라는 뻔한 구절을 속삭이며 침대에 눕는 나날들이 묘사되는 것이 끔찍할 만큼 괴로웠을 시간.
그 흔한 거짓말을 할 수 없을 만큼 매력적인 얼굴을 갈망하며 가질 수 없다는 죄책감과 체념에 사로잡힌 괴테는 결국 최후를 맞이합니다.
2) 베르테르 효과, 우상과 동경
여기서 주목할 점은 바로 “로테”라는 우리가 믿는 우상입니다.
그 우상은 가질 수 없는, 욕망의 우물로 가득 찬 살아있는 날 것의 생명체라고 책에서는 명시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현실에는 자신의 우상이 사망하거나 혼을 신에게 빼앗겼을 때, 그를 우상으로 삼았던 팬들과 여러 동경자들까지도 같이 스스로 극단적 선택을 하는 현상이 있습니다.
그 현상을 “베르테르 효과”라고 우리는 말합니다.
우상을 잊을 수 없어, 가는 길까지 함께하겠다는 극단적인 진심을 볼 수 있는 방법이죠.
우리도 욕망 앞에서는 절대로 우아해질 수 없습니다.
보통 이런 욕망을 느끼는 사람들은 남몰래 이것을 억누르고 살라고 하죠.
하지만 우리는 이것을 억눌러서는 안 됩니다.
남의 행복을 위해 자신의 고유적인 특성에 실금이 가는 행위를 할 필요는 없습니다.
어쩌면 이로 인해, 예를 들어 욕망으로 인한 감정변동이 심한 사람들로 인해 사회에서 감정적 영역이 요동칠 수는 있으나, 전체의 안정을 위해 폭주한 뇌를 잠재울 필요는 없지 않을까요?
저는 그렇게 믿고 싶습니다.
물론 그렇게 되는 것이 현실에서는 불가능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제가 그것을 바라는 이유는 하나입니다.
만약 제가 그 정도로 폭주 한다면, 한 번쯤은 아무런 제재도 받지도 않고 그 잠재력의 불태움을 마치 불멍처럼 가만히 지켜보고 싶기 때문입니다.
아이의 상상력을 깨워주는 베르테르 속 ‘욕망’
사회는 “천재, 문제아”를 동등하게 보는 경향이 조금씩 있기에, 이러한 천재적인 행동을 어쩌면 문제아적 행동으로 간주할 지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호르몬의 문제가 자신의 잠재력이 요동침을 뜻할 수 있다면…
그리고 사회적 제재에 대한 반항성을 보여주는 중요한 계기가 될 수 있다면, 오히려 그것을 그냥 놔두는 것이 최선책이 아닐까요?
베르테르는 우아한 욕망을 로테에게 최소한으로 표현하려 애썼습니다.
로테에게 그러한 감정을 표현하는 것은 금기시된 것이자, 해선 안 된다는 이성적인 규제의 비율이 더 강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와 신과의 대립에서 신은 인간의 그 우아한 욕망의 “우아함”이라는 요소 자체를 파괴하려 애썼던 것은 아닐까 싶습니다.
몽상 같은 하늘과 별들을 내 품 안에 안듯, 지금 이 시간이 멈추면 좋았을 듯.
인간의 망상력은 상상력을 넘어 인간의 존엄성과 사회적 특성을 초월하는 능력이 될 수 있습니다.
결국 베르테르는 신에게 항복했습니다.
로테를 향한 에로스의 사랑의 화살처럼, 유혹되고 매혹되어 버린 베르테르의 우아한 욕망을 지키려는 이성적 규제는 결국 감정적 욕망에 패배해 어딘가에 박혀서 나오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폭주하는 그 “우아한 욕망”이었던 것은, 결국 베르테르에게 실연과 아픔을 안기고 결국 죽음이라는 최후의 편안함을 선사합니다.
우리도 어쩌면 “우아한 욕망”을 표현하고 있지는 않을까.
지혜롭지 못한 상처가 생기도록, 욕망이 폭주하도록 내버려둔 상태는 아닐까.
애처롭게 질문해 보는 시간입니다.